선교적 공동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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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l Community (1)_ 선교적 공동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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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최근 한국 사회에 몰아닥친 웰빙(wellbeing) 열풍은 행복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삶의 현장이 얼마나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적 풍요와 삶의 질을 논하며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 곳곳에서 웰빙을 모토로 하는 산업과 마케팅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는 듯하다. 그 가운데 나타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흐름이 바로 힐링 신드롬(healing syndrome)이다. 한국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공을 쟁취해야 하는 사회다. 대학을 입학한 후에도 좁은 취업문을 통과한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성장은 잠시의 정체도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변화의 속도에 압도된 수많은 개인들은 참된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뛰고 또 뛰어야 한다. 그런 노력 덕택에 현대인들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삶의 행복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현대인들은 부족과 불안한 삶을 호소한다. 그래서일까? 끊임없는 삶의 레이스에 지친 이들에 대한 치유를 표방하는 힐링 프로그램은 많은 현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새로운 코드가 되었다.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현대 산업사회의 소유 중심적 삶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존재됨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했다. 베버(Max Weber) 역시 합리성과 이성에 기초해 자율적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 하면서 신과 종교를 저버렸던 인류가 맞닥뜨려야 할 운명, 즉 극대화된 이윤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삼은 근대인들은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의해 스스로를 철창(iron cage)에 가두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행복하기 위해 소유를 추구하지만, 소유로 인해 행복을 잃어버리는 삶의 아이러니! 물질문명을 최고의 신으로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 아닐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 고립과 소외, 외로움과 고독은 가속화되는 물질문명의 발전과 기술적 혁신이 결코 정신적, 영적 차원의 만족까지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참된 행복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그 분 안에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근대화를 통해 정착된 시스템들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을 촉진했다.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다. 그런 측면에서 본 소고는 인간 소외를 가속화 시키는 현 상황을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 공동체적 영성을 통해 선교적 삶의 실현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과 실천적 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파편화된 개인주의(Fragmented Individualism)
전통적 사회에서 자아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개인의 가치와 선택, 존재됨의 모든 것은 공동체의 틀 안에서 형성되고 규정되었다. 당연히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적 책임과 연대성 같은 요소들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근대시대에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인간의 독립성과 가능성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 진 것이다. 개인은 공동체와 종교적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합리적 사고를 통해 인간은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지식을 소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진보를 가져 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관점에서 미들턴(J. Richard Middleton)과 왈시(Brian Walsh)는 근대적 인간의 특성을 가르켜 “독립적”이며 “자기 의존적”이고 “자기중심적”일 뿐 아니라 “자기 통합적”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결국 피조물로서의 인간관은 점차적으로 희석되었고,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청은 커져만 갔다. 전통과 신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게 된 자아를 향해 인간은 스스로 “네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고 자랑스럽게 빚어낼 수 있다.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네 자신을 만들어 보아라.”는 자율을 외치게 된 것이다.
독립적 가치에 근거한 근대 사회는 이제 전문화와 세분화가 강조되는 시대로 변하게 되었다. 종교와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통합적 사회구조는 가정,직장, 종교, 여가활동, 시민의 책임 등 다양한 영역으로 나뉘어졌다. 각각의 영역들은 자신들만의 통제 시스템과 구조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렇게 변화된 삶의 기반은 결국 현대인들의 자아를 새롭게 형성하는 틀을 제공했다. 즉, 가정과 직장, 종교기관과 사회단체 등 개인이 속한 영역에서 요구하는 기준과 행동 양식에 따라 사람들은 그때마다 자신이 속한 영역에 맞는 변화를 수행해야 했다. 피터 블락(Peter Block)은 이렇게 세분화된 사회에 대해 각각의 조각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열심을 다하지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는 현실을 비평했다.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된 개인의 삶은 다양한 파편들의 조합으로 구성되고,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구조는 더 많은 스트레스와 외로움, 고독을 증가시켰다.
울리치 백(Ulrich Beck)은 역사상 유래 없이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근대산업사회가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을 인식하면서, 이를 “위험사회”라는 표현으로 형상화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ant Bauman) 역시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는 저서에서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진입의 용이성” 등이 이 시대의 삶의 특성이라고 해석했다. 현 시대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관점을 그는 이렇게 요약했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불안정성을 말하고, 독일 이론가들은 불확정성과 위험사회를,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불안을, 영국 이론가들은 불안정을 말한다.... 이 개념들이 파악하고 명확히 발언하고자 하는 현상은 (지위와 자격과 생계의) 불안정성과 (이것들이 지속되고 미래에도 안정적일지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일신상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 즉 소유물, 이웃, 지역사회의) 불안함을 결합한 것이다.
개인은 분열된 정체성과 실존적 불안정성 때문에 혼란과 고립을 경험한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은 삶의 피로도를 더욱 가중 시킨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개인에게 닥칠 외로움과 고독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은 서구 개인주의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이다. 리스먼(David Riesman)이 말한 것처럼, 현대인들이 느끼는 “군중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도시화(Urbanization)와 세속화(Secularization)
인간의 소외와 불안정성에 대한 이해는 도시화된 삶의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길버트 빌지키언(Gilbert Bilezikian)은 현대인의 소외의 문제를 삶의 기초단위가 되고 안정의 기반이 되는 가정 공동체의 해체로부터 발생했다고 믿는다. 가난과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척박한 농촌을 떠나 거대 도시를 향했던 이주의 물결 속에서 개인은 이제 물질 중심적 삶이 가져올 다양한 도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냉혹하다. “산업적으로 발전된 나라의 가정들은 이혼, 자녀 유기, 가정 내의 학대, 도덕적 상대주의, 물질주의, 이상의 상실 등으로 인한 현대 생활의 압력 때문에 연속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비 콕스(Harvey Cox)는 도시화라는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성과 전통의 붕괴가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들을 지적했다. 관계 중심적 삶에서 기능적인 형태로 삶의 중심이 이전되면서, 도시인들은 심각한 비인격화를 경험한다. 무엇보다도 홀로 삶을 개척하고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개인은 더욱 더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자연스럽게 사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무명성(anonymity)과 편리와 풍요를 위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이동성(mobility)이 강화된다. 결과론적으로 무명성과 기동성이 중요한 요소가 된 현실사회는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가?”를 묻는 실용주의(pragmatism)와 성전 밖(out of the temple), 즉 종교적 관점을 제해 버리는 불경성(profanity)을 기초로 한 세속적인 사회로 귀결되게 된다. 도시화와 세속화의 깊은 연관성을 그는 심각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화란 무엇인가? 콕스는 세속화를 “역사적 과정 속에서 사회와 문화를 종교적 지배, 패쇄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세속사회의 세대는 전혀 종교가 없는 시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또한 세속화의 과정 속에서는 종교를 무시하는 차원이 아닌 종교를 상대화시킴으로서, 전통적 종교들의 역할이 급격히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제 종교는 살아남기 위한 변화를 도모할 것인데, 그것은 세속화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적응을 시도 할 것이며 이는 종교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이해했다. 확실한 것은 크리스텐돔 시대(Christendom Era)에 지녔던 종교적 영향력을 이제는 더 이상은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물론 콕스의 전망은 비관적 관점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갱신 방안은 도시화와 세속화가 지닌 속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직시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과거 지향적이며 자기 보존적 성향을 제거할 것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에 민감하고 반응하는 재형성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21세기의 도시사회는 콕스가 전망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밀도(density)와 다양성(diversity), 그리고 복잡한 사회구조(complex social organization)로 대표되는 도시의 삶은 콘(Harvie M. Conn)과 오르티즈(Manuel Ortiz)가 명시했듯이 “종교적인 혼합주의,” “오직 절망만을 아는 사람들,” “보호와 안정성을 빼앗긴 세대,” “일탈된 하위문화,” “부의 불균형,” “사회경제적 차이” 등의 부정적 꼬리표가 늘 부착되어 있다. 세속화로 인해 현대인들은 더욱 외롭고 고독하다.
급격한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사회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2009년말을 기준으로 볼 때 총 인구의 90퍼센트가 넘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거주한다. 단시간 내에 고밀도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은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는 자살율, 이혼율, 저출산율 등, 부정적 지표들이 세계 1-2위를 오가는 불명예를 얻는 국가가 되었다. 대안이 시급하다.
소속(Belonging)과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목마름
클레이 서키(Clay Shirky)는 현대적 변화를 가르켜 혁명의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새로운 기술에 기초한 웹 2.0시대의 기술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공유와 협력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변화라고 보았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영향으로 이 세계가 얼마나 작아져 가는지, 또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얼마나 편리하게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체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그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 페이스 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 네트워크와 스마트 폰의 등장은 24시간 265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연결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커뮤니케이션의 혁신적 진화는 훨씬 더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실재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활동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의 중심에는 참여자가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가 중심이다. 대부분의 사이버 공동체는 개인의 기호와 관심에 의해 가입과 탈퇴가 결정된다. 본인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또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 때 미련 없이 떠난다. 믿음과 신뢰, 사랑과 헌신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가 아닌 개인의 만족과 호기심에 기초한 공동체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소속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컴퓨터와 핸드폰을 붙잡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롭고 불안하고 목마르다. 많은 팔로워 수가 개인의 실존을 지탱해 줄 만큼 충분한 안정과 소속을 제공할 수 없다.
현실에서 경험되는 실존의 위기는 집과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적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분산화와 가족의 해체를 통해 돌아갈 고향을 잃은 현대인들은 과도(過渡)적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경험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이렇게 평가했다.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공동체들이 실제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최근 수십 년 동안처럼 ‘공동체’라는 말이 무분별하고도 공허하게 남발된 적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확실하고 영속적인 소속 집단을 찾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러한 방파제는 산산이 부서져버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강타할 파도 앞에 속수무책이 되었다.
소속과 관계에 목마른 세대, 신기루와 같이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허무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사람들은 품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동체는 어떠한 모습일까? 사회학자들은 진정한 공동체를 소속감과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찾는다.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그의 저서 Bowling Alone(나 홀로 볼링)에서 공동체의 건강, 교육적 성취, 지역 경제의 힘, 다른 공동체적 복지 등은 그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밝힌바 있다. 즉, 개인들의 연계와 이를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때 진정한 공동체는 회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선교적 접촉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인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한계와 그 한계 속에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파편화되고 죄로 물든 세상의 한계이며,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연약함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안에서만 온전히 경험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진정한 공동체 성을 기초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시대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파편화된 교회(Fragmented Church)
과연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속감과 하나됨에 대한 소망을 제시하는 공동체가되고 있는가? 또 교회는 그 본질상 자기 스스로를 공동체성에 기초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존재 양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향력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촉진하고 있는가?
아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더 크고,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인 가치 아래 모든 것을 제공하려는 백화점식 서비스를 지향한다. 맥닐(Reggie McNeal)은 그 이유를 교회에 대한 이해가 사람(who)이 아닌 무엇(what)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람(who)으로서 교회를 이해했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예수의 지속적인 성육신이 이루어지는 통로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유기체적으로 예수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그 생명력을 가진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많은 경우 종교 기관 그 이상의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의식으로서의 모임과 예배, 그리고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능적 측면에 사역에 초점을 기울이고 있다. 수많은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더 나은 교회(what)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이, 교회는 어느덧 소비자 중심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적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미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대형교회운동(mega church movement)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대형교회 그 자체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툼마(Scott Thumma)와 트라비스(Dave Travis)의 연구에 의하면 대형교회일수록 지역 공동체에 더 많은 선행을 베풀고,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 성도들의 헌신을 강조하고, 다양성과 매력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음을 보고했다. 작은 교회들이 건강성과 효율성을 위해 배울 것이 많다고 그들은 보았다. 실재로 작은 교회들은 (미국의 경우) 0.3%에 국한된 대형교회들을 배우고 모방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그 안에는 대형교회처럼 되고자 하는 열망도 깔려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이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현실은 어떠한가? 에디 깁스(Eddie Gibbs)는 대형교회의 성장은 주위의 작은 교회들에 의해 제공되는 공급시스템(feeder system)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즉, 성장의 대부분은 이미 다른 더 작은 교회-이들 중 대부분은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이다-에 출석하고 있던 기존 성도들의 전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도화된 교회가 지닌 모순적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작은 교회들은 대형교회를 닮기 위해 노력하고, 대형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의 자양분을 먹고 성장하는 기현상 말이다. 우주적 차원에서 하나의 교회됨을 상실한 교회는, 종교기관으로서 각자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자기 성장에 몰두하는 파편화된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의 공동체성은 지역과 교단을 넘어 하나 됨의 회복을 통해 시작된다. 개별 교회들이 함께 협력하고 동역함을 통해 파편화된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치유하고 화목케 하는 공동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강조는 성장을 위한 방편이나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됨의 원형과 본질이 바로 이 공동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소속과 하나 됨에 대한 현대인들의 목마름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선교적 대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적 과제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공동체의 존재 양식과 실천적 사역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호에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자.
워십리더 매거진 2013년 1월호
이상훈 교수
서울신학대학교(B.A., M.Div.)와 미국 풀러선교대학원(Th.M., Ph.D.)을 졸업하고 현재 풀러선교대학원 한국어학부 교수와 아카데믹 멘토로 섬기면서 ‘선교역사’와 ‘현대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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