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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영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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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EAN AN
댓글 0건 조회 2,372회 작성일 17-07-0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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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영성 (1)

                                                                                                                                                                       이상훈 교수

 “Ministry flows out of being!”


풀러신학교의 리더십 교수인 로버트 클린턴(Robert Clinton)이 천 여명이 넘는 지도자들의 삶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발견한 이 짧막한 이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진리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 진정한 사역은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일시적 효과를 일으키는 유행을 통해 형성될 수 없다. 그것은 사역을 이끄는 지도자의 존재됨(being)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존재됨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 외적인 측면이 아무리 화려해 보이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진다 할지라도, 본질적 가치와 철학에 기반을 두지 못한 사역은 영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은 사멸되고 말 것이다.

선교적 교회 운동(missional church movement) 역시 동일하다. 1960년대 이후 교회 갱신과 부흥에 직접적 동력을 제공했던 교회성장 운동(church growth movement)이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이제 많은 사람은 선교적 교회가 그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듯하다. 그래서 기존의 사역들 위에 선교라는 라벨을 붙이고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한다. 교회의 브랜드를 새롭게 탈바꿈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락스버그(Alan Roxburgh)와 보렌(Scott Boren)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는, 선교적교회가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실천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꼬리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1900년대 중반, 선교의 영역에 대한 신실성이 망각되어갈 때 “만일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If everything is mission, then nothing is mission).”라는 스테픈 닐(Stephen Neill)의 선언처럼, 본질이 누락되고 표어만 난무하는 선교적 교회가 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사라져 갔던 과거의 수많은 운동과 그 운명을 같이하고 말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 핵심은 교회됨의 본질 회복에 있다. 이 사역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부르심을 재조명하며, 개인과 신앙 공동체의 운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부르심은 구원과 회복을 통해 진정한 화목을 성취하기 원하시는 창조주의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의 외침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을 통해 실현되는 거룩한 책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됨은 그 부르심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가운데 형성되고, 그 고귀한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걸어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 확인되는 자기 발견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영성, 그 일그러진 자화상

모든 사역이 자신의 존재됨으로터 기인된다면, 교회의 사역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영성, 또한 성도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적 영성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사역의 기초가 영성 대신 기술이나 전략적 차원에 머물 때 불거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역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역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근래에 출판된 서적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얼마나 많은 책이 ‘생존’과 ‘물리적 성장’ 자체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여기 저기서 열리는 컨퍼런스와 세미나는 어떤가? 마치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만 하면, 놀라운 양적 성장과 더불어 진부했던 교회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던져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그런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접근들이 모두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끝없이 밀려오는 변화의 해일 앞에 항해의 방향조차 결정하기 힘든 현실 앞에 서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문화변혁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는 다양한 노력들은 분명히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전략과 전술이 있고 새로운 기술과 진보된 방법들이 제시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건강하고 깊이 있는 영성에 뿌리내지지 못한 채 행해진다면, 그래서 결국 세속적인 기업과 단체들이 행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추구한다면, 구별됨과 탁월함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기독교적 정체성과 그 독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속적 영성에 침몰된 복음! 트리니티 신학교의 데이비드 라센(David L. Larsen)이 ‘탐욕의 복음’(The Gospel of Greed)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삐뚤어진 영성은 번듯한 외형과 달콤한 유혹을 앞세워 십자가의 영성을 무기력화 시키고 있다. 오늘 우리는 세상적 가치에 부합하는 복음, 부와 건강과 평안과 번영을 최고의 축복으로 숭배하는 복음, 자기 중심적이며, 자아도취와 자기몰입을 선으로 여기는 복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자율적인 존재임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세우기에 몰입되어 있는 복음,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대신 자아성취와 자기실현, 자기강화를 위해 형성된 복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비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자아의 논리에 놓인 현대인들은 끝없는 물질주의를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신앙의 사유화와 세속화의 길에 들어선 교회의 운명은 결국 성도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소멸케 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은 너무 쉽게 이러한 이중적 고백을 드린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천국도 함께 주소서!” 그래서 라센은 세속적 욕망에 대한 정당화를 강화하고 끝없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자화상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일그러진 모습, 일그러진 영성을 소유한 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 영성이 가득 찬 교회는 결국 세상의 물결에 침몰될 운명에 처할 뿐인 것이다.

새로운 희망, 새로운 현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는 우리의 희망이며 동시에 사명이다. 올슨(David T. Olson)은 이것을 교회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꿈과 희망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삶과 공동체, 문화와 세상을 변형시키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만 가능함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래서 올슨은 교회 공동체 모두가 거룩의 영을 입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파괴하는 세속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시는 그분의 사역에 대해 헌신적으로 동참할 때 그 꿈은 성취된다고 말한다.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성! 세상을 위해 존재하지만 세상에 함몰되지 않는 선교적 영성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방안으로서 이 시대에 만연해 있는 왜곡된 영성의 특성을 알아보고, 선교적 영성을 위한 실재적 의미와 대안을 살펴보자.

이원론적 영성(dualistic spirituality)

영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해는 영성을 경건한 삶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이슈는 영성과 경건의 속성인데, 보쉬(David Bosch)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영성이나 경건한 삶은 세상에 대한 금단 증상 같은 것이어서, 자신의 배터리를 충전해야만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영적 충전소처럼 활용한다. 경건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관심사는 얼마나 충분히 충전했는가, 또 충전된 영성을 소멸시키는 세상적인 일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가급적 세속의 일을 버리고 영적인 순간들로 채우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마치 어떻게 하면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것인지에 대한 묘안을 찾으며,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고립’되기 위해 스스로 애쓰는 모습은 경건을 추구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egin)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천로역정 모델’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분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은 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할 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왜곡된 영성의 한 줄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접근의 근간에는 일상의 삶, 일상의 문화, 일상의 사건들이 전혀 영적이지 않다는 편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곳과 하나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세속적 영역이 존재한다는 이원론적인 믿음을 강화시켰다. 세상과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부각되면서, 초월적 삶만을 동경하는 신앙적 흐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별이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과 속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은 15세기 이후 발흥한 근대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이전의 서구사회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적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과 과학의 토대 위에 발전하게 된 근대 사회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형성하고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파편화(fragmentism) 같은 새로운 흐름을 가져오게 되는데, 북미 근대 정신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존 듀이(John Dewey)는 이 시대의 변화를 다음의 네 가지 요소로 설명하였다: 첫째, 근대는 초자연적인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둘째, 교회에 최고의 권위를 두었던 중세와 달리 근대는 개인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관찰, 경험, 사유의 방법을 추구하며 진리를 얻는다. 셋째, 미래에 대한 낙관론적 관점을 통해 무한한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강조한다. 넷째, 끊임없는 진보는 인간의 노력과 근면, 자연에 대한 연구와 통제를 통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기술과 과학, 경제의 엄청난 발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지속적인 진보를 꿈꾸게 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율적 존재(homo autonomous, autonomous being)로서 인간은 더 이상 전통이나 종교, 신 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존재로 인식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 없는 영역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고, 영적인 것은 점차적으로 신뢰할 수없는 영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당연히 종교와 일상의 삶 사이의 연계성은 깨어지고, 세속의 영역과 영적인 영역의 분리는 더욱 가속화되며 고착되었다.

선교적 영성은 이원론과 세속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인간을 통합적 존재로서 간주하고 육와 영을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며, 성과 속의 개념으로 세상과 문화를 경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성육신이 단순히 상징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대변한다. 오히려 그분은 완벽한 인간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머무셨고,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으며,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예수님은 이렇듯 이원론적이고 성과 속을 인위적으로 구별하는 삶을 거부하셨다. 그 분은 통합적 관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셨고, 그렇게 행하셨으며, 그렇게 사역을 완수하셨다.

탈육신적 영성(Excarnational Spirituality)

근대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서구 기독교에 대해 테일러(Charles Taylor)는 계몽주의와 근대의 불신앙의 문화적 노선을 따르면서 탈육신(excarnation)의 과정을 통과해 왔다고 평가한다. 탈육신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의 반대적 표현이다. 사실 기독교 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으로부터 기인한다. 그 분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사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모든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척도를 가늠케 한다. 그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치유되고 하나가 된다. 세상과 문화, 우리의 존재됨과 연약함, 기쁨과 슬픔, 춤과 노래 등 모든 삶의 방식들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보고 느끼고 듣고 경험하면서 그의 주 되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근대는 이러한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관점대신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재 해석하던 시기였다. 점차적으로 실험 가능하며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면서 미학과 직관, 영적 안목과 감정, 예술이나, 시, 음악 등의 요소들은 이성적 영역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종교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신앙은 이제 더 이상 영적인 위치에만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질문과 비평 속에서 과학적 안목과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될 필요가 제기 되었다. 당연히 이성에 근거한 성경공부와 설교, 학문적 신학과 신조 등이 신앙 성장과 영성 개발을 위한 핵심적 사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깁스(Eddie Gibbs)와 볼저(Ryan Bolger)는 이러한 모습을 엘리트 주의의 문화단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즉 개신교의 이성 중심적, 문자 중심적 흐름은 이전에 이미지와 상징들, 스테인글라스와 이야기로 구현되던 신앙생활의 근거를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경험과 체험 중심적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신 기록된 말씀에 대한 논리적 해석과 전달이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미지와 상상이 중요한 요소가 된 오늘날, 당연히 ‘문자시대에 태어난 모던 교회는 프린트 문화에서 이미지에 근거한 문화로 넘어가는데 상당한 곤란’을 겪으면서 시대에 적합한 대응방식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도전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추상적 영성(Abstract Spirituality)

탈육신적 특징은 추상적 영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주의를 통과하면서 시대적 흐름에 부합한 변화를 추구했던 기독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과 지성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설교와 영적 성장, 제자화 등이 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대응이 실천의 영역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관념적 차원에만 머물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근대시대를 통해 형성된 신학의 특성이다. 이성에 근거한 인과론적 법칙(cause-effect application of principle)에 의해 발전된 신학은, 신앙을 조직화하고 다양한 비평을 통해 성서를 해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있는 신앙은 점차적으로 삶의 자리를 떠나 수동적이며 지적인 시스템 속에 머물게 되는, 즉 신앙이 신학 안에 갇혀 경직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장 극렬한 비판은 무엇인가? 그 중심에는 언제나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에 대한 부분이다. 그러나 좀 더 숙고해 보면, 그러한 불일치의 원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현세적 차원을 간과하는 추상적 영성에 머물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추상적 영성을 강력히 배격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14절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추상적 개념인 말씀(abstract)이 실재적으로 육신을 입고(concrete)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실천적 의미가 배재된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을 가르치셨지만, 비유를 통해 그것이 현실적 삶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우리의 영성이 현실에 기반을 두지 못한 추상적 영성이 될 때, 그 사역과 삶은 이 세상에 공허한 메아리로 머물고 말 것이다.

소비주의적 영성 (Consumerist Spirituality)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가치관은 소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근대 이전의 시대는 사실상 생존을 위해 재원을 확충하고 물건을 생산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문명이 발전하고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면서 생산과 소비에 대한 개념은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슬로건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하기 위해 산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 이것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최정점(climax)에서 형성된 현대의 양면적 가치를 대변해 준다.

그렇다면 양면적 가치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우리시대의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는 경제학적 개념의 단단한 보호를 받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소비사회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많은 경제학자들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소비는 좋은 것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적어도 소비가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채우고 시장 경제의 기초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입장은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가치가 공동체적 가치를 압도하는 오늘의 시대, 모든 사회의 우선순위는 개인의 필요와 만족에 집중하고 그것을 자극하기 위해 열을 올린다. 이 시대의 선(good)은 공동의 선이나 공동체적 가치가 아닌 개인의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있다.

오늘날 기업들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 못지않게 상품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들이 소비 자체보다 그 소비를 통해 만족과 행복을 경험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품질보다는 스타일, 실재보다는 이미지, 성능보다는 감각이 앞서는 문화적 변화는 소비주의 시대가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소비는 의미 체계다”라는 예언적 선언을 했다. 또한 스카이 제서니(Skye Jethani)는 브랜드를 중요시 하는 기업과 사회 구조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가 본질적 신앙에서 감각적인 신앙으로 그 형태가 변모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교회를 어떻게 선택하는지, 예배의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외적인 하드웨어 뿐 아니라 찬양과 말씀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등을 보라는 것이다.

소비주의에 기초한 현대 교회의 영성은 개인적 삶의 필요를 공급하고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개인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종교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의 사유화가 일어났다. 워싱턴 포스트는 “더욱더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신(their own god)을 만들어 내는 데 더욱 더 관용적이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로원 윌리엄스(Rowan Williams) 역시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개인의 소망 성취나 그 소명을 투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이 사실은 심리학자들이 종교를 향해 고소하려고 항상 시도해 왔던 불편한 일들”이라고 같은 논조로 비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역의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셨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셨으며, 그 복음에 근거해 사는 삶의 모습을 요구하셨다. 신앙 공동체는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곳도, 그들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아니다.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 그 분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자기부인과 희생을 전제로 한 제자의 삶이며, 성령의 가르치심과 함께하시는 여정을 통해 이 세상에 거하지만 이 세상과 구별되는 영성을 추구하는 삶에 있다. 선교적 영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세속적 영성과 구별되며, 탈육신화되고 추상화된 영성, 이원론적이며 소비주의적 영성을 배격한다.

                                                                                                                                                     워십리더 매거진 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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